라이프/문화

기다림이 피운 여름, 소나무가 떠난 자리에서

글·사진 최효진 (갈등전문기자·아파트 관리소장)

― 척박한 땅에서 만난 칸나의 시간

아파트 화단 한 귀퉁이에는 오랫동안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켰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소나무가 병들어 베어지던 날,

사람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밑동만 남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후로 그곳은 오랫동안 빈터였다. 돌과 마른 흙이 뒤섞인, 볕만 유난히 뜨거운 땅이었다.

지난 4월, 다른 단지에서 근무하는 소장님에게서 칸나 알뿌리 몇 개를 얻었다.

“한번 심어보세요. 잘 올라옵니다.”

그 말을 붙잡고 나는 빈터에 알뿌리를 묻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휑한 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보자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자연은 사람의 조급함을 따라오지 않았다. 4월이 지나고5월이 되어도 흙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매일 그 앞을 지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봤지만, 겉으로는 죽은 듯 고요했다.

괜히 심었나, 알뿌리가 상한 건 아닐까, 의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 무렵이었다.

5월 말의 어느 아침, 무심코 흙을 내려다보다 손톱만 한 초록빛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의 반가움은 이후 어떤 꽃이 피었을 때보다 컸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던 그 시간 동안, 땅속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있는 것은 아니었다.

6월이 되자 새싹들은 눈에 띄게 몸집을 키웠다.

넓고 싱그러운 잎이 겹겹이 펼쳐지며, 작은 알뿌리 하나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한 초록 군락을 이루었다. 죽은 소나무가 떠난 그 자리에, 이번에는 다른 생명이 조용히 몸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지나갈 때마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그 변화를 지켜봤다.

어느새 그 화단은 내게 계절이 넘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확인하는 창이 되어 있었다.

죽은 소나무가 떠난 자리, 6월의 칸나는 조용히 몸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8월, 마침내 첫 꽃이 피었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화단 속에서 선명한 붉은빛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 색이 얼마나 강렬한지, 무심히 지나던 발걸음마저 붙잡아 세울 정도였다.

다섯 달 가까운 기다림 끝에 피어난 단 한 송이였다.

4월에 심은 알뿌리가 8월, 초록의 정원으로 변했다.

꽃은 피는 순간보다 피기까지의 시간이 더 깊다는 것을, 이 작은 화단을 지켜보며 새삼 깨달았다.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던 침묵의 시간, 새싹이 올라온 뒤에도 필요했던 햇볕과 물과 인내의 나날들.

그 모든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이 된다.

온통 초록인 화단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붉은 칸나. 기다림 끝에 피어난 여름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애를 쓰는데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

그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땅속의 알뿌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기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스스로 세상 밖으로 싹을 밀어 올렸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듯,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때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땅속에서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만의 꽃을 피우게 될 테니까.

아파트 조경을 관리하다 보면, 나무 한 그루와 꽃 한 포기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누군가 관심을 주고, 기다려주고, 물 한 번을 더 주면 삭막하던 공간도 어느 순간 살아 있는 풍경으로 바뀐다.

이 일은 결국 나무와 꽃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매일 살아가는 공간에 표정을 더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 작은 칸나가 다시 일깨워 주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화단에 붉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나면, 사람들은 잠시 걸음을 늦춘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예쁘게 피었다며 혼잣말을 건넨다.

그렇게 작은 생명 하나가 사람과 공간 사이에 조용한 대화를 만들어낸다.

아마 내년 봄에도 이 자리에서 다시 새싹이 올라올 것이다.

올해의 꽃이 지고 나면 땅속 알뿌리는 다시 조용한 시간을 준비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은 화단을 내년에도 가끔 들여다볼 생각이다.

소나무가 사라진 빈자리에서 시작된 이 작은 칸나의 이야기가 올여름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꽃의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기다림의 가치였다.

그래서 올여름, 아파트 한켠에서 피어난 저 붉은 칸나가 유독 더 예뻐 보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마침내 피어난 꽃.

어쩌면 저 꽃은 올여름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기다림이 스스로 피워낸 가장 정직한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갈등전문기자, 아파트관리소장 최효진(ilovehyang@hanmail.net)

재8회 주택관리사 현 관리사무소장 조경기능사